매니 | 페 | 스토 (2022)

무슨 말을 써야할지 모르겠다.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는 것 뿐이 다. 과거를 놓고 가야 새로운 작업이 나올텐데. 너무 과거에 매여있는 사람인가. 나의 과거가 나의 미래에 짐이 되 지 않았으면 좋겠다. 과거의 나는 과거에 매여있어야 하고, 과거에 머물러야 한다. 현재의 나는 현재에 집중하고, 이 순간에 내가 어떤 작업을 할 수 있을지 묻자. 그리고 행동하자. 나에게 묻는 건 어쩌면 과거의 나를 버리는 것과도 같을지 모른다.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내가 만들어내는 거니까.

미래의 나는 하나의 도화지일 것이다. 아무것도 적히지도, 그려있지도 않은 그 어떤 것. 나의 선택들이 그 도화지를 채운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하지만 선택을 했고, 또 해야하는 순간들은 존재하며, 나를 위협한다. 그들을 그렇게 흘 러가게 둔다면 나는 나대로 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선택을 따라하고, 따라산다면 나는 그들이나 다름없 다. 내가 내가 되기 위해서 지어야 하는 무게감과 책임감이 힘들다.

하지만 내가 나를 보호할 수 없다면 누가 나를 보호해줄 수 있을까. 여태까지는 나를 상처입힌 사람들을 미워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온전한 책임이 있다. 어쩌면 고맙게도 그 책임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하나의 방편이며 도움일 뿐. 나는 나로서 존재해야 한다. 나는 나로서 존재해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고 보여주는 것이다. 옷차림부터 말하는 말투, 행동, 표정, 소비습관, 삶에서 택한 선택들. 그런 것들로 사람들은 나를 볼 거고 알아볼 것이다. 행복을 찾아서 떠났던 날들이 있었다. 행복을 위해서 러시아를 떠났고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서 정말 내가 원하는 게 뭘까 고민하기로 결정했다.

그 날들에 내게 있던 용기가 다시 생긴다면, 아직 마음에 불씨가 자라고 있다면, 그 안에서 나를 상처 입힐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남이 아니라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면, 나를 위해서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 렇다면 그 상황 안에서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선택을 틀렸다고 정의하고 싶진 않다. 그 과정을 통해 지금의 내가 존재하게 됐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의 선택들에 대해 후회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 과거를 내려놓고 다시 아무것도 없는 나로 돌아가 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을 뿐이다. 이곳이 이제 내가 속한 사회고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 난 나고 넌 너야.

다시 또 힘 내서 작업하고 살아가는 게 말이 되나? 그럴 만한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이제 정말 힘이 없는데. 그냥 속 이 뚫린 풍선인 거 같다. 구멍 난 항아리. 아무리 무언가로 채워도 다시 빠져나가는. 그런 것들. 이미 이렇게나 깨져 버려서 다시 붙여봐도 틈으로 슬픔이 삐져나온다. 이 슬픔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슬픔처리기가 있으면 좋겠 다. 그냥 그 안에 슬픔을 넣고 어지간히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있는 그런 거.

내 마음은 그런 처리기가 아니라서 슬프게도 넣어두면 흘러나오고 넘치고 깨지고 구멍을 내고 진물이 나고 다시 곪 고 다시 조금 나아지려나 싶으면 아프고 슬프고. 상처가 나을 때 쯤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곪아있는 거라면. 언젠가 모든 상처가 낫게 되는 날이 올까. 그러면 나도 괜찮아질까. 나의 슬픔리밋을 채우고 넣어두고 있으면 사라 지는 날이 올까. 그냥 그렇게 끝이 날 수 있을까.

인생은 슬픔의 연속이고 나는 지긋지긋하게 살아있다. 우울하고 슬퍼하면서도 지금 이곳이라는 시공간에 존재한 다. 어째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여전히 이렇게 숨을 쉬고 밥을 먹고 슬퍼하고 어떤 날들을 생각한다. 그 날들은 삶 의 이유도 되고 죽음의 이유도 된다. 존 케이지가 삶과 죽음은 사실 같은 거라고 하던데 마치 그런 것인양 군다. 슬 픔을 그냥 있는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것에 왈가왈부하지 않고, 그냥 아 지금 슬프구나. 언젠가 다시 기쁨이 오겠지. 이 시간도 지나갈 거야. 라고 생각 하게 된다면. 그 마음이 나에게 평안으로 다가올 것이다. 굳이 지금 슬프다고 해서 슬픔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그 냥 아. 지금 그렇구나. 하지만 나의 평소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그게 가능은 한가 싶지만… 그냥 바람이니까.

내 마음을 간단하게 움직일 수 있다면 그냥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면 내가 원하는대로 모든 일이 이뤄진다면 좋겠다. 그럼 이 상처들을 먼저 없애고 항아리를 교체한 후에 슬픔은 다 내던지고 슬픔처리기를 만들어야지. 그리 고 그 슬픔을 못본 체 하며 내 멋대로 살아버리겠어.

의미없는 말들이지만 정말 일어난 일인듯이 얘기하고 싶다. 그게 나의 정해진 미래야. 나는 그렇게 살 거야. 어쩌면 이곳에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게 여기가 비록 깨졌지만 그 슬픔처리기인 것 아닐까. 못본척할 수는 없지만 더욱 더 많은 슬픔을 쏟아부어서 모두 겹쳐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든다면 그냥 그 슬픔을 두고 살게 되지 않을까.

세 개의 빔 프로젝터를 통한 비디오 설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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